정림사지는 부여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북쪽으로 부소산, 동쪽으로 금성산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인근 지역의 표고는 대체로 0~14m 분포를 보이지만, 정림사지 주변은 약 30m 이하의 지형이 분포합니다. 북쪽 부소산과 동쪽 금성산은 약 120m 내외의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 내용이 새겨진 정림사지의 석탑은 백제 왕조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었습니다. 정림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기와조각 중,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해당하는 글이 새겨진 것은 이곳에서 출토된 고려 기와 중 가장 수량이 많았으며, 정림사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입니다.
정림사지의 가람배치형식은 일탑식배치로,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회랑으로 구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는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정림사지 앞의 연못은 정비되어 있으며, 1933년에 건립된 건물은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곳에는 백제 때 세워진 5층석탑(국보)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이 남아 있으며, 백제 벼루, 토기, 흙으로 빚은 불상들 등의 출토유물도 있습니다.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사찰로, 북동에서 남서로 경사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조성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북동쪽은 높게 깎아내고, 서남쪽은 낮게 성토하여 사찰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또한, 정심사지 사역의 남편과 서편은 원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매우 낮아져 사찰이 더욱 두드러지게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유적으로는 중문, 금당지, 강당지, 승방지, 회랑지 등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북, 동, 서 승방지의 배치는 백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회랑에 접속된 건물들은 전형적인 <1탑-1금당> 양식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중심지는 탑과 금당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전체 사찰지는 북승방지에서 중문지까지 107m의 길이와 동서건물지 외곽 기준으로 62m의 폭을 갖습니다. 모든 건물들은 기와로 쌓은 기단 위에 목조 건물로 건축되었으며, 중문지 남쪽에는 두 개의 연못이 발굴되었습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
백제 시대 장인들은 목조 건축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 건축에 도전하였습니다. 석재로 만든 석탑은 목조탑과 달리 세부 형식을 단순화하고 규모를 축소하여 가공적으로 용이하게 만들어졌으며, 그 중 대표적인 예로 정림사지 석탑이 있습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달리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어 있으며, 섬세하고 세련된 미를 보여줍니다. 단층기단과 각층우주에 나타난 민흘림,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는 목조 건축물의 기법을 차용하였지만, 창의적인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구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며, 면석 각 면에 우주와 탱주를 하나씩 세웠습니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작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여 목조건물과 유사한 외견을 보입니다. 이러한 구성은 수리적 원리에 의해 아름다워 보이게 만들어졌으며, 지대석의 크기가 높이와 너비를 결정하는 탑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정림사 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이며, 건립 기본 단위는 그 절반이었습니다. 탑신의 네 모퉁이에는 민흘림의 우주를 만들고 그 사이에 판석을 끼웠으며, 안정감 있는 체감률의 격조 높은 모습을 보입니다.
익산미륵사지석탑은 백제시대의 석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2기 중 하나로,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라 할 수 있습니다. 목조건물의 구조를 모방한 것이지만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줘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띠고 있습니다. 탑신 4면에는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의 소정방이 그 기공문을 새겨 넣었습니다. 익산 일대의 발굴조사에서는 정림사지 석탑과 함께 출토된 기와들에 정림사명이 새겨져 있어 이 지역에는 정림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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