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에 지어진 창덕궁은 경복궁의 이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이후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궁궐 건물이 완성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후원을 확장하여 궁의 경역을 15만여 평으로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실되었지만, 선조 40년(1607)에 중건을 시작으로 광해군 5년(1613)에 완성되었으나, 인조반정 때 대부분의 건물이 다시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며, 여러 번 화재로 인해 희정당과 대조전 등이 소실되어 경복궁의 건물을 철거하여 1920년에 창덕궁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창덕궁은 258년간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온 법궁으로, 돈화문, 인정전,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과 왕과 왕후,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그리고 연회, 산책, 학문 등을 즐길 수 있는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덕궁은 건축과 조경이 어우러져 완성된 대표적인 궁궐 중 하나입니다. 궁궐 내부의 건축물은 정전, 편전, 침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건물은 궁궐의 위엄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창덕궁의 건물배치는 경복궁과는 달리 여러 축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궁궐 정문으로부터 금천교를 건너면 인정전과 선정전 등의 정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편전과 침전은 정전의 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한 창덕궁은 후원도 매우 유명합니다. 후원은 자연스러운 산세를 활용하여 인위적인 건축물을 최소화하고, 대신 자연의 수목과 연못, 정자 등을 활용하여 조화로운 조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후원은 창덕궁 창건 당시에 조성되어 창경궁과 연결되도록 계획되었으며,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창덕궁의 조경은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완벽한 건축물로, 건축사적으로나 조경사적으로나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태종 5년(1405)에 창건된 이래 300년 이상을 유지해온 역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덕궁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궁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조선왕조의 궁궐 중 하나입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왕실의 거처와 휴식처로 사용되었으며, 정자, 후원 등 다양한 건축물과 조경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창덕궁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인조 원년 이후에 개수와 증축된 것이며, 이곳에는 수많은 희귀한 수목들이 우거져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창덕궁은 자연경관과 건축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건축물로서,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명소 중 하나입니다.
창덕궁의 역사는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동궐도는 1830년 경에 그린 것으로, 궁궐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달하고 있어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하고 고증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중 하나로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동궐도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건축 그림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려졌다. 이 그림은 가로 576cm, 세로 273cm의 비단에 먹과 채색 물감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궁 안에 있는 건물 뿐만 아니라 누정, 다리, 담장, 연못, 괴석 등 궁궐 주변의 조경과 경관까지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당시의 화공기법과 정밀성을 엿볼 수 있다. 환경전과 경복전 건물은 없고 터만 그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제작 연대는 1826년 ~ 1828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예술적 가치와 함께, 동궐도는 궁궐 연구와 복원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창덕궁 궁궐전각 관람동선(돈화문-금천교-궐내각사-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낙선재)
창덕궁 후원 관람동선(후원입구-부용지-애련지-연경당-관람지-옥류천)
돈화문(敦化門)-敦化 :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
창덕궁의 대표적인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된 건물로, 창덕궁 앞에 위치한 종묘와 함께 궁의 진입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2층 누각형 목조건물은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앞에는 넓은 월대가 두어져 궁궐 정문의 위엄을 더합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되었으며,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을 통해 들어갔습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이 매달려 있어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9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이제는 궁궐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0년대에는 건축물과 정원을 복원하여 창덕궁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습니다.
금천교(錦川橋)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에 위치한 명당수 위에 건축된 돌다리입니다.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궁 밖으로 나가는데, 궁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화강석 6~7단을 쌓아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금천교를 설치했습니다. 이 다리는 1411년에 창건되었으며, 이후에도 많은 화재와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궁궐 내의 돌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의장을 갖춘 국왕 행차 때 노부의 폭에 맞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 다리의 상면은 길이 12.9m, 너비 12.5m로 폭이 매우 넓습니다. 구조는 하천 바닥 중앙과 물가에 놓인 기반석 위에 물가 쪽으로 부벽을 두어 축대 구실을 하고 있으며, 홍예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멍에돌이 얹혀 있습니다. 다리의 상면은 불룩하게 곡면으로 만들고 바닥을 3칸으로 구분하여 각 칸마다 장대석을 고르게 깔았습니다. 다리 가장자리에는 이주석 위에 동물상을 조각한 석조상이 세워져 있으며, 난간은 법수와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판석은 하엽동자기둥 모양의 부조를 중심으로 2칸으로 분절되어 있고, 칸마다 안상을 투각하여 놓았습니다.
법수 밑에는 멍엣돌에서 돌출된 석재에 짐승머리 모양을 환조로 조각하였으며, 다리 측면의 홍예 사이 벽에는 귀면형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또한 홍예 기반석 위에는 동물상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금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습니다.
인정전(仁政殿)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입니다. 조정이 펼쳐진 마당 앞쪽에 위치하며,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 건물은 2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입니다.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이 없어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해 소박한 모습을 보입니다. 바닥에는 원래 흙으로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지만, 지금은 마루로 바뀌었습니다. 1908년에는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서양식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인정문 밖 외행각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이 위치했습니다. 인정전은 1405년(태종 5)에 창건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소실되었지만, 1610년(광해 2)에 재건되었고, 1803년(순조 3)에도 소실되었지만 이듬해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되었습니다.
선정전 (宣政殿)- 宣政 : 정교(政敎)를 선양(宣揚)한다
편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로, 고위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았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렸으나, 1461년에는 선정전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일상 업무뿐만 아니라 조정회의, 업무보고, 경연 등 다양한 회의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인조반정과 임진왜란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647년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되었습니다. 그 후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은 비서실과 부속실로 사용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좁았습니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며, 이곳은 순조 이후에는 희정당으로 기능이 이전되면서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희정당(熙政堂)-熙政 : 화락한 정치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은 경복궁 내의 희정당입니다. 이곳은 원래는 숭문당이라 불렸으나 1496년에 희정당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원래의 편전이었던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이후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희정당은 1917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서 지은 것입니다.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으나, 현재의 희정당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쪽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내부가 서양식으로 꾸며졌습니다.
대조전(大造殿)-大造 : 큰 공업(功業)을 이룬다
침전 대조전은 창덕궁의 중요한 건물 중 하나로,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건물 주변에는 수많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흥복헌은 비극적인 역사가 담긴 장소입니다.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곳입니다.
원래는 대조전을 둘러싸고 있는 부속 건물들이 많았지만, 1917년 화재로 인해 대조전이 소실되었습니다. 그 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이곳으로 이전하여 재건하였습니다. 이때 창덕궁의 상황에 맞게 대조전 주변에는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을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하여 구성을 재조정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창덕궁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부는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서양식으로 개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왕실 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서, 창덕궁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부용정(芙蓉亭)-芙蓉 : 연꽃
아름다운 건물들로 이루어진 이 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이며, 휴식과 학문, 교육을 위한 공개된 장소였습니다. 부용지라는 300평(약 1000㎡)의 사각형 연못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규장각과 서향각은 왕실 도서관으로 사용되었으며, 영화당에서는 왕이 특별한 과거시험을 보기도 했습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로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입니다. 연못에 피어 있는 한송이 꽃의 형상을 따서 만든 부용정은 연못에서 빛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영화당은 연못을 내려다보며,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조망합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특색 있고 아름답지만, 모여서 풍경을 이루는 모습이 더욱 절묘합니다. 현재는 어수문을 중심으로 한 생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하여 지역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불로문(不老門), 애련지(愛蓮池)-不老 :늙지 않는다, 愛蓮 : 연꽃을 사랑한다
숙종 18년(1692)에는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정자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져 있다. 숙종은 연꽃을 특히 좋아하여, 애련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습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하는 것은 더러운 곳에 있어도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군자의 덕을 지니고 있다"고 새 정자의 이름을 정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애련지 서쪽에는 연경당 사이에 하나의 연못이 있었는데,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이제는 없어졌습니다.
순조 27년(1827)에는 효명세자가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지으며 담장을 쌓았습니다. 현재 기오헌이라는 현판이 달린 의두합은 8칸의 작은 서재이며, 매우 소박한 건물입니다. 바로 옆의 건물은 운경거로 추정되며,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입니다. 이러한 건물들은 군자의 성품을 반영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존덕정(尊德亭)과 폄우사 -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쳐 경계한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권면하는 말
이 지역은 후원 중 가장 늦게 조성된 곳으로, 원래는 네모나 둥근 모양의 작은 연못 3개가 있었으나 1900년대 이후 곡선형으로 변화되어 현재는 관람지로 불립니다. 연못을 중심으로 육각형 겹지붕을 갖춘 존덕정,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 서쪽 언덕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 관람정 맞은편에는 승재정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폄우사는 원래 'ㄱ'자 모양의 부속채가 있었지만 현재는 없어져 단촐한 모습이며, 숲 속에 자리한 승재정은 사모지붕으로 날렵한 모습을 보입니다. 1644년에 지어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로,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지어졌다고 추정됩니다.
옥류천(玉流川)- 玉流 : 옥같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
다양한 각도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르며, 1636년(인조 14)에는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바위에는 인조의 친필로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가 있으며, 숙종의 작품으로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오언절구 시가 있습니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漪亭)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입니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있습니다.
연경당(演慶堂)과 선향재(善香齋)- 演慶 : 경사(慶事)가 널리 퍼진다, 善香 : 좋은 향기가 서린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인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에 건립되었습니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경에 고종이 새로 지은 건물로 추정되며, 사대부 살림집을 모델로 한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결된 내부 구조를 갖고 있으나, 단청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일반적인 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것에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으로 더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서재인 선향재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입니다. 후원에 위치한 농수정은 날렵한 모습으로 마치 매가 날개를 펼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안채 뒷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반빗간도 있습니다.
고종 이후에는 연경당이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거나 연회를 베풀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창덕궁 야간관람(달빛기행)
4월 5일부터 4월 8일까지 4일간, 창덕궁 깊이보기 중 희정당 야간관람 '창덕궁의 밤, 희정당과 오얏꽃등'이 1일 2회씩 운영됩니다. 희정당은 대조전과 함께 조선 시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창덕궁의 내전 영역에 속하는데, 전각으로 '밝은 정사를 펼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번 야간관람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6점의 장식뿐만 아니라 근대시대의 다양한 전등으로 중앙 접견실과 귀빈실, 복도 등 권역 전체에 불을 밝히며 불 켜진 창덕궁의 아름다운 야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이번 행사는 중학생 이상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며, 선착순으로 예매 가능합니다.
창덕궁 관람안내
- 후원은 외국인 관람시간에만 가능하며, 내국인은 외국인 동반 시에만 입장 가능합니다.
- 무료 및 할인 대상자 및 통합관람권 소지자는 사전 예약 후 당일 현장에서 증빙서류나 자료를 확인하고 티켓을 교환해야 합니다.
- 후원 관람은 제한된 지역으로, 해설사의 인솔 하에 회차별 최대 100명까지 입장 가능합니다.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한 인원은 50명, 당일 현장에서 발매되는 티켓은 50명입니다.
- 창덕궁 후원 관람은 제한 관람 지역으로, 관람 시간표에 맞춰 해설사의 인솔 하에 회차별 최대 100명(인터넷 예매 50명, 당일 현장 발매 50명)까지 입장 가능합니다.
- 관람일 선택: 관람 희망일 제외 6일 전 오전 10시부터 예약 가능합니다. (선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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