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은 지리산 자락을 따라 흐르는데, 이곳을 따라가다 보면 매화나무가 지천으로 늘어서 있는 섬진마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마을은 밭과 산에 곡식 대신 매화나무를 심어 매년 3월이 되면 하얗게 만개한 매화꽃이 경치를 아름답게 해줍니다.
이 마을에서는 매화꽃이 피는 계절에 적합한 강바람과 물안개가 매실농사를 돕습니다. 그 결과, 연간 수확량은 100톤 이상에 이르고, 매화꽃은 3월 초순부터 지리산 능선에 눈이 내리듯이 하얗게 만개하며, 매실 수확은 6월에 시작됩니다.
매실은 다른 꽃들이 깨어나기 전에 먼저 꽃을 피우고, 여름 벌레들이 나타나기 전에 수확되어 농약이 필요 없는 청정과일입니다. 이곳 섬진마을에서는 매화나무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재배한 청매실농원이 있으며, 70년생 매화나무 수백 그루를 비롯해 매실 식품을 만드는데 쓰이는 전통옹기 2,000여기가 농원 뒷편의 왕대숲과 함께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또한, 매년 3월마다 섬진마을에서는 '매화축제'가 열리는데, 이곳의 아름다운 매화꽃을 감상할 수 있으며 지역 농산물과 전통음식 등도 즐길 수 있습니다.
매년 3월이 되면 광양시의 섬진강변 다압면을 비롯한 전 지역은 긴 겨울을 지나 새로운 봄을 알리는 매화의 향기와 함께 눈부시게 물들어 집니다. 이 곳은 매년 매화축제로 떠오르며, 매화뿐만 아니라 계절마다 다양한 야생화들이 활짝 피어 방문객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 지역의 매화는 3대에 걸쳐 가꾸어진 명인의 정성과 함께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며, 2,500여 개의 전통 옹기와 함께 깊은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매화뿐만 아니라, 산과 강, 바다의 아름다움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광양시의 매화축제는 매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옵니다.
관광객들은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 즐길거리를 즐길 수 있으며, 올해도 예정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방문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예정입니다. 섬진강 하류 백운산 자락의 새하얀 매화와 함께 새로운 봄을 맞이해 보세요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이야기
매화만큼 선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꽃이 어디 있을까요? 꽃말 또한 고결한 마음, 인내, 청결, 정조, 충실입니다. 그중에서도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548년, 조선 최고 학자 퇴계 이황(1501~1570년) 선생이 단양 군수(사또)로 부임합니다. 선생의 나이 48세 꽃 중년이었습니다. 선생은 부임 전후 몹시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열여덟 살 관기 두향과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두향은 빼어난 미모에 글과 시 거문고에 능했다고 합니다. 마흔여덟 퇴계 선생의 마음을 흔든 두향은 매화마을 퇴계선생의 마음을 흔든 두향은 매화를 무척 좋아했으며 퇴계 선생이 매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이미 간파했던 두향은 남자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았던 것입니다. 두향이 퇴계 선생에게 매화를 선물하자 청백리 퇴계는 그것도 뇌물이라 생각해 받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두향은 "매화는 고상하고 격조가 높으며 향기로운데다가 엄동설한에도 굽힘이 없는 기재를 가졌다며 우리고을도 그렇게 잘 다스려 달라고 설득하자 퇴계는 흔쾌히 받아 드렸습니다. 이 후 두 사람은 산수가 수려한 주변을 다니며 풍류를 즐기고 시를 읊고 거문고 타며 함께 단양팔경을 완성해 갔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는데 퇴계 선생이 단양 군수 10개월만에 그만 이별을 맞습니다.
퇴계 선생이 떠나자 두향도 후임사또에게 자신이 다른 남자를 모실 수 없음을 청하고 관기에서 나와 고향마을 강 맞은편 강선대 옆에 초가를 짓고 퇴계 선생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생활합니다. 단숨에라도 달려가 만나고 싶었지만 공직에 있는 선생을 위해 그럴 수도 없음을 아는 두향. 퇴계 선생 역시 두향을 잊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가끔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퇴계 선생은 풍기에서도 1년만에 병을 이후로 사직하고 안동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며 살았습니다. 두향과 떨어져 산 지 20여년, 두향이 선물한 매화를 보면서 '저 매화나무에 물 잘주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두향은 퇴계 선생의 부고를 듣고 며칠을 날 밤 새며 퇴계 선생에게 달려갔지만 남몰래 빈소만 바라보고 통고하며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며칠을 굶다가 집 근처 강선대에 올라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너무나 애절한 러브스토리입니다. 무릇 서른 살 나이 차를 넘어 조선 최고의 학자와 관기와의 짧지만 긴 여운, 오늘날 우리도 이런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가슴속에 품고 산다면 참으로 훈훈한 사회가 되지 않을 까 싶습니다.
-광양 매화마을 박양자 해설자
함께 읽으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