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조선 태종 때 도호부 승격을 받아 한양 4진 중 하나로 선정되었습니다. 광주, 강화, 수원, 개성에 진을 설치하여 한양을 보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수원 화성은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매년 가을마다 수원화성문화제를 개최하여 이 화성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조선 시대의 성곽 건축 중 가장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1796년에 완공된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침을 기리기 위해 수원 화산에 위치한 원침을 옮겨 지은 것입니다. 이 성곽은 당시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 실현을 위한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건립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의 건축은 문신 정약용이 지은 '성화주략'을 기반으로 하여,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지휘로 1794년에 착공되었고 179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석재를 옮기며 쌓는 데 거중기와 녹로 등의 신기재를 사용하여 고안되었습니다.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의 부속 시설물도 함께 건립되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많은 시설물이 소실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 뿐입니다. 수원 화성은 팔달산(높이 143m)을 중심으로 쌓여 총 길이가 5,700m에 달합니다. 이 화성은 그저 단순한 '성'이 아니라 역사적, 건축학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수원 화성의 축성은 정조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는데, 정조는 즉위 13년만에 부친의 고혼을 위해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신도시 건설을 위해 수원 화성을 축성하였습니다.
화성은 조선 성곽제도의 최고 완성형으로, 한국성곽 발달사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 성은 석성과 토성의 장점만을 살려 축성되었으며, 화성축성에 매달린 선조들은 한국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서양의 축성술을 참조하였습니다. 이 성과 관련된 사항은 "화성 성역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이 성의 건축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서고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서적들을 섭렵하고 중국에서 들여온 『고금도서 집성』 5,000권을 참조해 새로운 성곽을 설계하였습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거중기를 고안하였습니다. 화성에는 성문을 비롯하여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복원된 것을 포함하여 41개의 시설물이 남아 있습니다. 팔달문을 비롯해 팔달산을 둘러싼 시설 가운데 가장 높은 서장대, 화포를 감춰두고 적군에게 총을 쏘도록 축조된 남포루, 선조들의 정취가 가득한 방화수류정 등 200년 전 건물에서는 조선의 문화 향기가 가득합니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적 가치로 인해 화성은 1997년 12월 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은 한국의 역사적인 유산 중 하나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부 손실을 겪었지만,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하여 대부분을 복원하여 현재까지 이어져왔습니다. 수원화성은 면적이 130ha이며, 둘레는 5,744m로, 동쪽은 평지를 형성하고 서쪽은 팔달산을 끼고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남쪽 수문은 2012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축성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북쪽의 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은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으며,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은 여전히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성의 축성 동기는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정치, 경제적인 측면과 부모님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되었으며, 성 자체가 동양 철학의 "효"사상을 담고 있는 문화적,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입니다. 이와 관련된 문화재들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동양성곽의 백미로,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성벽은 외축내탁의 축성 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 방법 등을 사용하여 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축성 기술들은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건축사적 의의는 매우 큽니다.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으로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한 수원화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입니다. 수원화성은 축성 계획부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 일지 등 세밀하게 기록된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대표적인 동양성곽입니다. 또한, 팔달문, 화서문, 장안문, 서북공심돈, 방화수류정 등의 소장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큽니다.
화성행궁
화성행궁은 수원화성와 함께 건립된 궁궐로, 전국 행궁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왕실의 휴양지로 사용되었으며, 전쟁 시 비상시 거처로 사용된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과는 용도가 다릅니다. 화성행궁은 수원부 읍치 자리로 건립되었으며,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긴 후 건립되었습니다. 1796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왕이 수원에 내려와 머무르는 장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궁궐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던 것도 특징입니다. 화성행궁은 행궁 중에서도 원대한 규모와 격식을 자랑하며, 경복궁에 못지 않게 아름다운 건축물입니다.
1790년부터 1800년까지 11년간, 정조는 12차에 걸쳐 능행(陵幸)을 진행했습니다. 이 때마다 화성행궁에서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고, 승하한 뒤에는 화령전을 건립하여 왕의 진영을 봉안했습니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된 행궁 가운데 가장 규모와 격식이 뛰어났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은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911년부터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병원과 경찰서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전개하였고, 1996년에 복원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는 2002년에 완료되었습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또한, 1919년 3월 29일에는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습니다.